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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행 비행기에서 쓰는 글 -김규리

그리스행 비행기에서 쓰는 글 -김규리
지금 나는 비행기 안이다. 아부다비를 경유해 내일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 예정이다. 방금 중국 상하이 상공을 지났고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노트북 밝기는 최저로 낮춰 글을 쓰고 있다. 비록 이코노미 클래스지만 노트북을 펼쳐 놓으니 출장 떠나는 비즈니스맨이 된 기분이다. 타이핑 소리가 시끄러울까 걱정했지만 기내 엔진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덕분에 부담 없이 글을 쓰고 있다.
그라데이션의 순간
색깔이 전환되는 경계를 그라데이션이라 한다.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은 마치 그라데이션 안에 있는 기분이다. 국경과 시간의 경계가 흐려진 채 도착한 곳은 새로운 세계가 예정되어 있는 경험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 삶도 그라데이션의 순간에 놓여있는 것 같다. 2주 전까지 9시-6시 출퇴근하던 생활에서 디지털노마드로 전환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이후 직장 생활을 성실히 해왔다. 괴로워하며 견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8시간 동안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게 답답했다. 그리고 조직과 나의 균형잡기가 유독 힘들었다. 사회생활을 위해선 적당한 가면을 쓰는 것이 현대인의 지혜인 줄 알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가면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무거웠다. 그 무게를 견디다보면 어김없이 몸과 정신이 이상신호를 보내왔다. SOS치듯이 다급하게 말이다. 이 삶의 대안으로 발견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직장인의 삶을 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위해선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아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에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 걸쳐 놓은 한 발을 떼지 못한 채 새로운 삶으로 뛰려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불만족과 불안이 반복되었다. 최근에 또 한 번의 취업과 몸의 이상신호, 퇴사를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차라리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버리자. 변화의 불안을 감수해보자. 큰 위험이지만 그만큼 큰 보상이 따를지 누가 알겠는가? 내 삶이 변화하는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직장생활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과감하게 해외 워케이션을 결정했다. 그렇게 그리스행 티켓을 구매했다.
그래서 왜 그리스에 가는가?
첫 유럽 여행인데 그리스만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꽤 의아해한다. 근처에 인기 여행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튀르키예, 이탈리아 사이에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10여년 전부터 내 버킷리스트이다. 친구의 소개로 그리스 식당을 가게 된 이후에 음식과 분위기에 빠져버렸다. 이후 한국의 괜찮은 그리스 식당을 찾아다니고 그리스의 쌈장이라 불리는 ‘차지키’라는 요거트 소스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해가 쨍쨍하면서 습하지 않은 날씨를 좋아하는데 바로 그리스의 지중해성 기후가 그렇다. 10년 간 꿈꾼 그리스 여행은 버킷리스트를 넘어 판타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디지털 노마드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 꿈을 이룰 가능성이 열렸다. 시간,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디지털 노마드를 결심한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출국 전 면세점 인도장에서 직원이 ‘인천 출발 아테네 도착 맞으시죠?’ 라고 물었는데 그 순간 내가 그리스에 간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이렇게 제3자의 말로 들으니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여행 아니고 워케이션이요.
디지털 노마드의 출국은 100% 놀러간다고 할 수 없다. 이건 워케이션이다. 일을 위해 챙긴 장비들만 빼도 짐의 3kg는 가벼워질 것이다. 그리스에서 할 일은 영상, 그림, 글쓰기 등이다. 올해부터 유튜브 브이로그, 인스타툰, 뉴스레터 에디터를 시작했고 어떤 작업이 꾸준히 오래 즐거울 수 있을지 스스로 실험 중이다. 낯선 나라에서 얻는 영감으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싶다. 아직은 수익도, 수요도 많지 않은 작업들이지만 꿈을 이룬 사람의 행복의 에너지를 담다보면 직업으로 곧 성장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지금의 그라데이션의 순간이 지나고 도착한 곳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펼쳐질까?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밤이다.